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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5년 전 캥거루

오늘 안나 씨의 캥거루 이야기 읽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. 15년 전, 동물원 좋아해 주말마다 가던 시절의 일이다. 요즘은 동물원에 못 간다. 동물들의 형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달라진 게 없겠지만, 내가 달라져서.
 
 
그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됐겠다.
 
 
“캥거루가 왜 캥거루인지 알아?”
 
 
좀처럼 우리 밖에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, 동물원 블랙 리스트에 캥거루가 있다. 개미핥기에 비하면 자주 나와 있는 편이지만, 지난 몇 년의 경험 상 30% 정도의 확률이다.
 
오늘은 다행히 캥거루를 볼 수 있었다. 반가워 그저 바라보며 좋아서 웃는데,
 
“캥거루가 왜 캥거루인지 알아?”
 
소아마비인 듯, 다리를 저는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묻는다. 불퉁한 얼굴로 저만치 뒤처져 따라오던 딸은 아버지 질문을 무시했다. 왜 사람 많은데서 이러느냐 따지듯 굳은 표정으로 대답 없이 아버지 손을 잡아끌며 길을 재촉하는데,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. 서울 사투리,
 
“캥거루가 왜 캥거루인지 알아?”
 
캥거루와 선교사와 원주민이 등장하는, 이야기로서는 그럴싸하지만 사실이라 믿기엔 좀 어정쩡한, 꾸벅꾸벅 조는 신도 깨우려고 목사가 가끔 하는 이야기.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재밌어 했고 마침 캥거루 본 김에 딸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. 딸은 듣고 싶지 않고.
 
물론 딸이 화가 난 이유는 난 모른다. 어쩌면 동물원 특유의 누린내, 한입 베어 물자마자 툭 땅에 떨어져버린 솜사탕, 모처럼 동물원 왔는데 금방이라도 비 쏟아질 듯 궂은 날씨, 분명 꼭 쥐고 있었는데 어느새 날아가버린 풍선, 비좁은 전철 안에서 찌그러진 김밥, 동물원 햄버거집 앞에 너무 길게 늘어선 줄.. 뭐 그런 시시한 이유로 화가 났을지도 모르고, 저 남자가 지금 여기서만 저리 빛나듯 환하게 웃지 집에서는 밤마다 깡소주 마시며 “내가 왜!” 헛소리 해대며 애 패는 순 나쁜 새끼일지도 모른다. 그러니 딸이 화난 이유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.
 
하지만 아예 모르겠다기엔 그의 태도와 말투, 표정, 손에 든 물건을 고른 안목 등에서 묻어나는 평화로움과 온화함, 그에 비해 딸은 아무 말 안 했으니 말투로는 알 수 없고 단지 잔뜩 찌푸린 표정에서 드러나는 상당히 골 깊어 보이는 불만.. 뭐 그런 단서들로 보아 짐작건대 남들과 다른 아비에 대한 부끄럼이겠거니 싶더라.
 
나도 저 아이처럼 아직 덜 자라서 몸 불편한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괜히 못 본 체한다. 게다가 상황이 어째 참 쓸쓸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흘낏 곁눈질로 애비와 딸이 서로 맞서 버티는 모습을 관찰했다. 여전히 아비는 묻고 딸은 어서 가자 재촉하는 풍경,
 
“캥거루가 왜 캥거루인지 알아?”
 
어서 자라거라.
 
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다만, 언젠가 너의 아버지가 부끄럽지 않은 날이 올 거다. 그 날이 오면 아마 아버지 대신 못난 니가 부끄러워질 지도 모르지만, 아직 넌 어리니까 괜찮아. 그러니 그저 어서 자라거라. 캥거루가 왜 캥거루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 재밌진 않지만 나름 재밌고. 그러니 기대해도 좋아,
 
진심으로 빌었다.